달변(達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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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변(達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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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임스 (122.♡.248.6) 작성일19-06-02 19:45 조회6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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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변(達辯)

 

      이동신

 

  큰 고모는 돌아가셨지만 내게는 원래 두 분의 고모님이 계셨다. 사람에 따라서는 고모가 먼 친척일 수도 있지만, 3대가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옛날 우리 집에서는 고모들이 내게는 누나이자 어머니였다.

오히려 동생들에 대한 추억보다 고모들에 대한 추억이 더 많다.

큰 고모는 인자한 편이었는데 일찍 출가를 하셨고, 작은 고모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다.

어린 나는 개구쟁이 소년이었기에 작은 고모와는 늘 긴장관계에 있었다.

작은 고모는 시집을 가기 전까지 사사건건 나를 구속하고자 했고,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그 손아귀에 벗어나고자 했다.

수시로 요동치는 조카를 응징하기 위해 매섭게 노려보던 고모의 눈길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모의 눈에 나는 뭔가를 몰라서 겁도 없고 툭하면 말썽을 피우는 조카였다.

 

  내 고향은 높은 산 중턱쯤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처음 올라온 사람들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가을추수가 끝나면 어김없이 낯익은 고추장수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동네사람들과 가격흥정을 한다. 아이들은 사랑방에서 놀다가 어른들이 흥정하는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마루로 뛰어나와 구경을 하곤 했다.

장사꾼들은 고추 빛깔이 나빠서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다고 깎아내리기 일쑤였고 할아버지는 고추알이 굵고 햇빛에 잘 말린 태양초라고 역정을 내셨다.

정성을 다해 말린 고추에 대해서 장사꾼이 의도적으로 너무 깎아 내리면 때로는 화가 나신 할아버지가 고성을 지르며 장사꾼을 마당 밖으로 쫓아 버리기도 하셨다.

어느 겨울날 나의 작은 고모가 처녀로서 아름다움을 꽃피워 가고 있을 때 혼사 이야기가 한참 오고 갔다. 당시는 처녀총각이 맞선을 보지도 않고 집안 어른들끼리 혼인서약을 맺기도 했던 터라 소문에 의지하고 모든 것을 평판에 맡겼다.

 

  믿을 만한 결혼중매인의 말에 의하면, 멀리 영주에 사는 총각이 양반 집안이고 사람도 아주 좋다고 했다. 혼사문제로 집안이 뒤숭숭하던 어느 날 오후, 낯선 고추장수가 저울을 들고 우리 집 마당에 나타났다.

이 장사꾼은 집안 고추를 둘러보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고추 값을 흥정하지 않고 우리 식구들 얼굴만 유심히 훑어보고는 그냥 돌아갔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이번에 온 고추장사는 얼굴이 검고 우락부락해서 소도둑 같다고 하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에게는 고추를 사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신랑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영주에 살고 있다는 양반 집안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언약을 했다.

퇴계(退溪) 13대 손으로 자부심 높으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결혼의 첫째 조건이 인물보다 가문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고 신랑이 우리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 식구들은 깜짝 놀랐다.

보름 전에 우리 집을 다녀갔던 그 고추장수가 이번에는 신랑이 되려고 당당히 다시 찾아왔던 것이다. 고추장수로 위장했던 부정직한 사윗감을 할아버지는 언짢게 생각하시는 거 같았고, 할머니는 처음 볼 때는 소 장수 같았는데, 다시 보니 남자답고 믿음직스럽다고 흔쾌히 승낙하셨다.

 

  이보다 4년 전에는 큰 고모가 결혼을 해서 시골집을 떠나갔다. 울산에 사시는 큰 고모부는 마른 체형에 뛰어난 달변이 웅변가이셨다.

반면 작은 고모부는 체구는 컸으나 과묵하셔서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말수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 분이 만나면 이야기 궁합이 잘 맞았고, 언변이 좋으신 아버지까지 합류하여 셋이 되면, 새벽녘까지 술을 드시며 이야기꽃을 피우셨고 어머니는 술시중을 드느라 밤잠을 못 주무셨다.

이때 술이 취하신 큰 고모부 입에서 간간이 나오는 말이 영감이었다. 대낮에는 장인면전에서어른~, 어른~하면서 아부를 하였고, 밤이 깊어 장인이 사랑방으로 건너가고 술기운이 더 오르면 처가식구들 앞에서 호칭이 바뀌었다.

영감이라는 말은 장모(할머니)가 주로 쓰는 말이지만 큰 사위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면 할머니도 후련하신지 재미있어 하셨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점잖으신 작은 고모부는 술이 아무리 취하든 누가 뭐라고 하든 호칭이 항상 정중한 장인어른이었다.

할머니는 개그맨처럼 재미있는 큰 사위를 만나면 웃기에 정신이 없으셨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작은 사위를 만나면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신명이 나셨다.

큰 고모부는 대구 출신인데 도회지 사람답게 박식하였고 유머에도 능했다. 방학 때 큰 고모부와 유원지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낯선 아이들이 근처에서 뛰어 노는 바람에 먼지가 크게 일자,

", 이 놈들아! 뛰고 싶으면 먼지가 안 나게 다리를 어깨에 좀 둘러메고 뛰어라" 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통 치시면 주변이 어느 새 조용해졌다.

또 직장에서 정년퇴직할 무렵이 되어서 회사 관리자가 뭐라고 하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내가 돈 벌려고 회사에 나왔지, 일하러 회사에 나온 줄 아느냐?' 며 큰소리로 관리자를 되레 나무랐다.

큰 고모부는 감정이 풍부하시어 감정표현을 잘 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누구보다 애달프게 우셨고 장례 일을 도맡아 하신 다정다감한 사위였다.

 

  반면 작은 고모부는 남의 이야기를 흠뻑 빨아들이며 들어주는 마력이 있었다.

그냥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그 케(그러게), 말이야" 하면서 빙그레 웃기만 하시는데도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100% 전달된다고 믿으면 사람들은 더욱 신명이 났다. 작은 고모부는 내게도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참담한 심정으로 고모님 댁을 찾아갔을 때,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고모부가 하신 말씀은 단 한마디였다.

"그래, 개구리가 더 높이뛰기 위해 한 번 움츠리는 거지. 걱정 마, 허허허

나는 이 빈 말에 속아 오랫동안 엄청난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훗날의 예언이었고 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었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남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돌이켜 보면 작은 고모부는 듣기의 달인이었고, 최고의 달변가였다.

달변(達辯)이란 말을 많이 하거나 유창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세상의 이치를 관통하고 치밀한 고민 끝에 나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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